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집에 있는 교회’ 칼럼 #250 _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2024년 10월 넷째 주 칼럼(2024.10.27. ~ 2024.11.2.)
성령강림절 후 스물셋째 주일
예레미야 31:7-9
히브리서 7:23-28
마가복음 10:46-52
오늘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여리고에 살고 있는 디매오의 아들 ,맹인, 거지, 바디매오이다. 그에게 붙은 수식어를 먼저 살펴보자.
‘여리고’는 여호수아에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성읍이다.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가장 큰 성읍이다. 반대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에 있기도 하다.
마가복음 본문 상 지금 예수와 제자들은 예루살렘 상경기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다. 공생애 3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이다.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라고 기록하는데 사실 이 문장에는 바디매오의 실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바디매오, 바~디매오’라는 뜻이 디매오의 아들 이라는 의미이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께서 시몬을 부르실 때 “바요나 시몬아!” 부르셨는데 그 의미가 “요나의 아들 시몬아!”이다. ‘바요나’, ‘요나의 아들’이다.(마16:`7) ‘바~디매오’,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보면 여기 맹인 거지는 자신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사람이다. 어느 복음서에도 그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마가복음에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그의 아들로 불러졌던 사람으로 기록할 뿐이다.
그 다음 수식어는 ‘맹인’이다. 앞을 볼 수 없다. 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늘 마가복음 본문과 마태복음(20:29-34)과 누가복음(18:35-43)에서 여리고 맹인에 대해 기록한다. 마태복음에 두 맹인이라는 특징이 있지만 같은 평행본문으로 본다. 맹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여리고에 들어온 예수의 무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구걸을 하며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예수가 여리고에 들어오셨다는 말이 들리고 여느 때와 다르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자신이 구걸하고 있는 곳으로 오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이 구걸하고 앉아있는 자리로 예수의 무리가 지나갈 때 바디매오는 알아차린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셨구나! 주위에서 ‘예수이시다’ 소리가 들리자 바디오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젓 먹던 힘을 다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친다.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향해 조용하라고 꾸짖는다. 바디매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더 큰 소리로 외친다. 예수를 만닐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_막10:47
다른 사람들은 모두 꾸짖고 야단을 치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예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신다. 바디매오를 부르시고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께 나아온다.
너무도 감격스러운 예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소원을 물으신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까!
앞을 보지 못하고 맹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살아오면서 얼마나 큰 장애물이었을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어려움이었을까!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예수께 말한다.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앞을 보기 원하는 그에게 더 놀라운 선물을 준다. 앞을 볼 뿐 아니라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 물론 바디매오의 구원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이 일을 겪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을테니 그에게 구원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자신의 이름조차 불려주지 못하고 디매오의 아들이라고 불려졌던 사나이. 앞을 보지 못하고 거지로 구걸하며 살았던 인생. 우리의 인생의 모습이 아닌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런 인생도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찾아와 주시고 말씀을 건네주신다. 우리가 할 일은 그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어느 곳에서든지, 어느 순간이든지 그가 필요로 할 때 “예수님” 아니 친구처럼 그냥 “예수야” 부르면 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_렘31:7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겠다” 그런데 그 남은 자가 어떤 자들이나면 맹인, 다리 저는 사람,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남은 자로 돌아오게 하시겠다 하신다. 이들은 모두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다. 바디매오와 같이 맹인으로 자신의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모든 남은 자에게 다시 보게 됨과 구원이 임한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_히7:24-25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가진 것이 있고 삶에 불편함이 없으면 과연 얼마나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맹인, 다리 저는 자, 거지, 바디매오와 같은 사람이 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쉽지 않고 어렵게 느껴지고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기에 우리는 더욱 더 예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른다.
오늘도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간절히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