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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 2

 

‘집에 있는 교회 칼럼’ #103 _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 2

 

2021년 12월 둘째 주 칼럼(2021.12.12. ~ 2021.12.18.)

대림절 샛째 주일

 

스바냐 3:14-20

빌립보서 4:4-7

누가복음 3:7-17

 

 

 

우리는 지난 주에 함께 생각해 보기로 했던 바울사도의 세 가지 권면을 먼저 떠올려보며 시작합니다.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은 무엇일까?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것은 무엇일까?

의의 열매가 가득한 것은 무엇일까?

 

세례요한은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한 자로 보내심을 받고 자신의 사명을 따라 최선을 다해 주님의 길을 준비합니다.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모습만이 기록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는 세례요한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에게 모여든 사람들에게 전한 그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세례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불어서 지난 주에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했던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적용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_눅3:7-9

 

세례요한은 사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있는 그대로 모두 선포합니다. 보통 배짱 아니면 도저히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세례요한에게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무리들이 묻습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_눅3:10-11

 

각 질문하는 무리들의 질문과 세례요한의 대답 속에서 세 가지 질문에 대해 함께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좀 더 대답하기 쉬운 방법은 반대로 질문을 해 보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여기서 선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더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나누지 않는 것이 선한 것이 아님을 이들은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무리들이 진실하지 못하고 허물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옷 없는 자, 먹을 것이 없는 자들에게 진실하게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옷 없는 자에게,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나아가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어렵지 않게 진실되게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무리의 허물도 동일합니다. 가지고 있는 자가 자신만 누리고 있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분명 함께 나누고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무리들이 의의 열매가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땅에 의를 이루는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의’에 대해서는 지난 번에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의’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체다카’, ‘미쉬파트’입니다. 쉽게 말하면 체다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의’를 말합니다. ‘미쉬파트’는 사회정의과 같은 개념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엄밀히 따져보면 두 개념은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마지막 심판의 날 양과 염소로 세우실 때 오른편 양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들이 섬긴 작은 자들이 바로 나였다”라는 말씀 속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작은 자들이 바로 작은 예수로 우리에게 오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관계를 온전히 이루는 것은 주변에 작은 자들을 계속해서 살피고 돌아보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사회정의를 이루는 것이 됩니다.

 

세례요한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부류는 ‘세리’입니다. 이 장면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합니다. 당시에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세례요한에게 찾아와 질문하는 부류는 ‘세리’와 ‘군인’입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하고” _눅3:12-13

 

세리들이 선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세리들은 의례하던 대로 모두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잘 모르는 백성들에게 거둬야할 세금보다 더 거뒤들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아마도 너무도 당연해서 별로 죄로 여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세리들이 진실하지 못하고 허물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금을 거둬들일 때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 거둬들이지 않는 것은 진실되지 못한 그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그들에게 있어서 허물이 됩니다.

세리들에게 의의 열매가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리들은 분명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은 당하지만 많은 부를 누리고 있는 부류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돈이 없는 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고 오히려 더 착취하고 로마의 등을 업고 ‘의’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_눅3:14

 

군인들에게 있어서 선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종종 무리 안에 들어가면 그 무리가 악한 일을 하는데 앞장 서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은 정말 예의도 바르고 친절하고 정말 멋진 사람들인데 이상하게 일본이라는 한 무리가 되면 각 개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전체주의적인 모습으로 바뀝니다. 무리의 공동화 현상입니다. 군인들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군인이라는 무리가 되면 선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악행을 일삼습니다. 당시는 로마 치하에 있는 군인들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식민지에 있는 백성들을 어떻게 대우했을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군인들이 진실하지 못하고 허물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은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아라. 제주에 4.3사건이 일어났을 때 군인들의 이러한 만행은 도를 넘었던 적이 있습니다. 거짓으로 고발하고 사건을 만들어서 양민을 학살하는 일을 일삼았습니다. 힘이 있는 자들은 반드시 진실하게 허물이 없도록 더 각별히 신경을 쓰고 살펴야 합니다.

군인들에게 의의 열매가 맺어지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너무도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정복한 나라에 대해서 약탈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여기서 의를 이루는 첫 번째는 먼저 자신이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여기고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리. 세리. 군인 이들은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대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지 살펴보고 그들에게 준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주목해 봅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나 자신에게 질문하고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오실 길을 성실히 잘 준비하며 살아가는 아끈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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