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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헵시바와 쁄라

‘집에 있는 교회 칼럼’ #108 _헵시바와 쁄라

2022년 1월 셋째 주 칼럼(2022.1.16. ~ 2022.1.22.)

주현절 후 둘째주일

이사야 62:1-5

고린도전서 12:1-11

요한복음 2:1-11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기뻐하는 자이다”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로 이 땅에서의 사명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사명자로 세움을 받고 이 땅에서 이루신 첫 표적이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_요2:11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이적은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이적입니다.

수많은 해야 할 일 중에서 첫 번째 이적이 결혼식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첫 이적을 혼인잔치에서 행하셨을까요?

이 사건에서 대부분 물이 포도주로 바뀐 이적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저는 이적 자체가 아닌 이적이 일어난 곳이 어떤 곳인지에 주목해서 보게 됩니다. 가나 혼인잔치 이적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중요한 관계를 알리고자 하심이 아니였을까요! 가장 먼저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보여주실 관계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 된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첫 이적을 혼인잔치에서 행하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부부관계라는 것을 말입니다.

부부의 관계는 참 신비로운 관계입니다. 그 누구보다 가까운 관계이면서도 까딱 잘못하면 그 누구보다도 먼 관계가 되고 맙니다. 주님과 부부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은 그 누구보다 가까운 관계로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 아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함께 하는 관계가 되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게 관계가 됩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_사62:4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앞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주님을 구주로 믿는 자들을 ‘헵시바’와 ‘쁄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헵시바’의 뜻은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입니다. 헵시바의 의미를 들을 때 우리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에서 들은 음성이 떠오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가 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있건 어떤 존재이건 주님 안에 있는 당신은 헵시바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향해 “너는 나의 ‘헵시바’란다” 말씀합니다.
‘쁄라’의 뜻은 ‘결혼한 여자’입니다. 우리가 결혼한 여자와 같을 것이라는 어리둥절한 예언입니다. 어쩌면 불경스러운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결혼한 여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니 말입니다. 부부관계가 되면 촌수가 같아지는 동급입니다. 하나님과 동급이 된다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의 ‘열처녀 비유’(마25:1-13)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만 신경을 쓰고 기도하면서 관심을 놓치지 않으면 그 기름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채워져서 준비된 신부로 신랑을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노인팅(anointing)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기름부으심입니다. 우리는 기름부으심을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표현합니다. 신부의 기름은 은유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채워진 신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부된 교회인 우리는 성령(기름)을 가득 채워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신랑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의 열처녀 비유가 종말에 대한 비유로 쓰여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면 나타나는 모습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기름을 채우고 있는 신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카리스마’, ‘은사’라고 부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기록한 신약의 말씀이 여러 곳 있습니다.(롬12,고전12-14장,엡4:11-16,벧전4:10-11) 그 중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은사에 대해 자세하고 포괄적으로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4-11절에 성령의 은사를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사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분별함, 방언, 통역함입니다. 각각의 은사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증거이기도 합니다. 각각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내가 어떤 성령이 은사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에 대해 11절에서 말씀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_고전12:11

여기서 참으로 감사한 것은 신부마다 채워야 할 분량이 똑같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각 신부에게 분량에 맞게 나누어 주십니다.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가진 은사가 부족하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에게 맞게 필요한 만큼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신부의 등잔대에 채워진 기름은 등불을 밝히며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름은 타서 없어지고 달아져서 줄어듭니다. 성령의 은사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면 타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기에 기름을 계속해서 채워 넣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곧 기름을 채워 넣는 방법은 기도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겁니다.
성령의 주어진 은사를 계속해서 사용함으로 등잔의 기름을 채워넣는 당신은 주님의 ‘쁄라’입니다. 주님의 신부요, 주님과 결혼한 여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