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교회 칼럼’ #146 _열명 중 단 한 사람만이..
2022년 10월 첫째 주 칼럼(2022.10.9. ~ 2022.10.15.)
성령강림절 후 열여덟째 주일
열왕기하 5:8-14
디모데후서 2:8-15
누가복음 17:11-19
성경에는 ‘나병’에 관한 일화가 참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병’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왜 성경에 이렇게 ‘나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할까요?
성경에 기록된 ‘나병’은 현재 의학계에서 말하는 ‘한센병’과 같은 병인가?
영적인 의미로 나병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 해야하는가?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_왕하5:1
이번 주 성서일과 말씀을 중심으로 ‘나병’에 대한 이야기를 볼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는 참 독특한 본문이 등장합니다. 이라스엘과 남유다의 장군도 아닌 아람 군대장관 나아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방나라 장군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이방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는 이런 의미에서 더욱 분명하게 극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듯 합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사로잡은 지혜로운 어린 여종으로부터 한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고 이스라엘로 출발합니다.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자신의 옷을 찢으며 어떻게 그의 나병을 고칠 수 있을까로 몹시 난처해 합니다. 엘리사가 그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전합니다. 나아만 일행이 엘리사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했던 선지자가 자신을 맞이하지도 않고 만나지도 않고 하는 말이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것입니다. 먼 이방나라에서 온 군대장관을 자신에게 오라고 해 놓고선 자신은 나오지도 않고 말도 안되는 명령을 하는 선지자를 향해 분노합니다. 종들의 설득으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은 나아만은 나병이 치료됩니다. 나아만이 나병에서 치료되는 과정을 보면 자신의 의사보다도 종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합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_왕하5:2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_왕하5:13
누가복음에는 나병환자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화도 독특한 특징을 가집니다. 보통 예수께서 환자를 치유하실 때 한 사람에 집중해서 치료하는 과정이 이야기되지만 이 일화는 열명의 나병환자가 등장합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멀리서 예수께 간곡 부탁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합니다. 놀랍게 제사장에게로 가는 길에 모두 깨끗함을 받고 치료함을 받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_눅17:12-14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치유함을 받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오직 한 사람만 예수께 나아와 엎드려 감사해합니다. 여기에 설명을 한 가지 덧붙입니다. 오직 그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하신 말을 보면 나머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모두 치유함을 받고 각자 제길로 가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유대인들보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오히려 더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세워질 때가 많음을 보여줍니다. 우물가에 사마리아 여인(요4:1-42), 죽어가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눅10:25-37) 그리고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은 열명 중 한 사람도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서 있을 때 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경에 나오는 문자적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너무 과도할 정도로 힘을 쏟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자적 뜻보다 그 문자가 내포한 의미를 되새길 때 온전한 성경적 의미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나병’이라는 단어도 문자적 의미보다 그 내포된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센병이라고 하는 나병이든, 다른 피부병이었든 무엇이 맞느냐보다 나병에 걸렸을 때 마음의 태도, 나음을 받았을 때 마음의 태도가 어떠하느냐를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너무도 잘 정리한 말씀이 디모데후서 2장 14-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_딤후2:14-15
이외에 성경에 기록된 나병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유다왕 웃시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웃시야가 하나님 앞에 죄악을 저질렀을 때 그의 이마에서 나병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대하26:16-19) 성경에서는 영적인 의미로 ‘나병’은 죄악의 결과임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을 영적인 의미로 나병에 걸린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병’을 영적인 의미로 생각해 본다면 예전에는 제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전가해야 했기에 힘들고 어려운 과정에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으로 십자가에서 단번에 우리 모두의 죄를 모두 사하여 주심으로 힘든 과정이 필요없이 주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모두 주님께 전가되어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고질적인 영적인 나병(죄)이 예전에는 치료하기 어렵고 복잡한 치료의 과정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너무도 쉽게 주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기면 하면 됩니다.
나병이 치료되는 과정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도 나의 힘으로도 모두 가능합니다. 나의 마음이 열린마음으로 주님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때 반드시 우리는 치유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을 말입니다.
오늘도 죄 덩어리에 불과한 이 괴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치유해 주셨음을 기억하고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이어야 합니다.
분명히 기억합시다. 열명 중 단 한 사람만이 주님께 감사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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