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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가난한 자 vs 부유한 자 Ⅱ

‘집에 있는 교회 칼럼’ #144 _가난한 자 vs 부유한 자 Ⅱ

 

2022년 9월 넷째 주 칼럼(2022.9.25. ~ 2022.10.1.)

성령강림절 후 열여섯째 주일

 

아모스 6:1-7

디모데전서 6:17-19

누가복음 16:19-31

 

 

누가복음 16장 19-31절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한 부자가 있는데 자기 자신만을 위해 호화롭게 살아가는 부자입니다. 그 부자에게 나사로라는 거지가 찾아오지만 문전박대를 합니다.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고 죽음 후에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고 부자는 음부에 고통 중에 거하게 됩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_눅16:19

 

음부에서 괴로워하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_눅16:25-26

 

부자와 나사로에 아브라함이 등장함으로 살아생전에 부자로 살았던 아브라함과 누가복음의 부자와 대조를 이루며 우리에게 분명하게 부자로 살아갈 때의 마음가짐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분명 아브라함도 이 땅에 사는 동안 부자로 살았습니다. 누가복음에 ‘한 부자’와 아브라함은 어떤 차이가 있었기에 부자 아브라함은 천국에 있고 ‘한 부자’는 음부에 있게 된 것입니까?

 

가지고 있는 ‘부’를 어떻게 사용하는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누가복음에 등장한 ‘한 부자’였다면 나사로를 어떻게 했을까요? 나사로에게 먹을 것을 주고 최선을 다해 돌봐주었을 것입니다. 죽음 후에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풀에 들어가 있는 모습 속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았고 그렇기에 재물에 대한 어떤 욕심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만을 위해 쓰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부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반드시 심판이 있게 됩니다.

 

디모데는 그런 의미에서 ‘부한 자들’에게 주는 권면을 따로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_딤전6:17-19

 

부한 자들에게 일곱 가지를 권면합니다.

1. 마음을 높이지 말아라

2.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3.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4. 선을 행하라

5. 선한 사업을 많이 하라

6.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라

7. 너그러운 자가 되라

 

혹시 나는 부자가 아니니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이야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지 않겠죠? 지난 주에 함께 나누었듯 부자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부자가 되기도 하고 가난한 자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우리는 그 어느 누구보다 부유한 자가 됩니다. 그렇기에 디모데가 부한 자들에게 한 권면은 믿는 사람들에게 하는 권면이 됩니다. 이 일곱 가지의 권면만 잘 지키며 살아가도 충분히 영향력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부자가 해야 할 일을 잘 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바로 그런 부한 자였던 지도자들에게 심판의 경고를 선포합니다. 예언서에 자주 등장하는 “화 있을진저” 심판선포를 보셨을 겁니다. 이 표현은 “너희는 진짜 죽었어, 이제 죽음만 남았어”라는 의미로 죽음선포라고 보시면 됩니다. 선지자의 목놓아 외치는 죽음선포로 부한 지도자들에게 경고합니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_암6:1

 

아모스에 등장한 지도자들은 디모데의 첫 번째 권면부터 거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남들의 어려움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만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디모데의 권면은 우리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한 부자’가 디모데의 권면을 따르는 자였다면 음부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더라면 음부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 돌보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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