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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믿음의 역사

 

‘집에 있는 교회 칼럼’ #149 _믿음의 역사

 

2022년 10월 다섯째 주 칼럼(2022.10.30. ~ 2022.11.5.)

성령강림절 후 스무첫째 주일

 

이사야 1:10-18

데살로니가후서 1:1-12

누가복음 19:1-10

 

 

어느 덧 2022년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올 한 해는 어떤 한 해였습니까?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은 잘 진행되고 있으신가요?

 

오늘은 이사야 말씀으로 그 문을 엽니다. 이사야 1장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심판이 임할 수 밖에 없는 여호와를 버린 신앙의 배교의 모습과 무자비한 악행을 고발합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_사1:1

 

이사야가 살아가던 시대이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시대이건 어느 시대이든지 신앙을 버리는 모습과 무자비한 악행의 모습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을 배역한 백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돔과 고모라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을 소돔과 고모라로 빗대어 설명합니다.

 

이사야가 살아가던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여호와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_사1:10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아” 하나님의 선민이라 말은 하지만 야웨 신앙을 떠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소돔의 관원들”,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차치하더라도 교회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라 불릴만한 사람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자들을 향해 외칩니다. “우리 서로 변론하자! 제발 돌아와라”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자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 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너희들의 죄가 주홍같고 진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고 양털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_사1:18

 

우리가 할 일은 계속해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소돔의 관원”이었던 한 사람이 다시 회복되는 삭개오라는 세리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_눅19:1-2

 

성경은 세리 삭개오를 여리고에서 ‘세리장’이고 ‘부자’라고 표현합니다. 여리고는 종려나무의 성읍(신34:3, 삿1:16)이라고 불렸습니다. 여리고는 지중해 연안의 블레셋 땅으로 나가는 길목이자 서쪽 요단 강의 넓고 비옥한 평원을 지키기 위해 경제와 전략적 가치 때문에 펠레스타인 최고의 성읍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곳에서 세리장이라고 한다면 큰 권력과 부를 모두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삭개오였지만 그에게 큰 약점 중에 하나는 키가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소문이 들립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오신다는 소문입니다. 삭개오도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를 보고 싶어 거리로 나오지만 모인 사람이 너무 많아 볼 수가 없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보기위해 앞서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갑니다. 사실 이러한 행동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여리고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삭개오인데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예수란 사람이 누구인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신분과 체통을 다 버리는 적극적인 행동이 예수를 볼 뿐만 아니라 직접 대화도 나누게 되고 심지어는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를 향해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_눅19:9

 

삭개오는 소돔의 관원이요 고모라의 백성과 같았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만나고 모든 죄가 사해지고 새 사람이 됩니다. 구원이 그에게 임합니다.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어떤 사람이도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 사람으로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아시기에 진정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지, 보이기 위해 겉치레로 회개하는 척하는 것인지 모두 아십니다.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은 감히 속일 수 없습니다.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새 사람이 되는 이러한 모습을 “믿음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교회를 한 곳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바울사도가 가장 먼저 쓴 편지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초대교회와 특히 데살로니가교회에 한 가지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예수의 재림, 강림입니다. 이 당시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이 살아있던 시기입니다. 그렇다보니 승천하시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곧 자신들에게 일어날 것처럼 여기는 교회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말에 대한 몇몇 오해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 심각해지면 안 될 것을 직감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너희가 예수 재림, 강림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다. 예수의 재림, 강림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는 것이지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매일 매일 주님 오실 날을 기대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된다” 이렇게 마음을 담아 권면한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잘못과 오해에 대해 설명할 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이들이 바울의 말에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다시 감사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가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그래서 시작부터 감사의 제목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_살후1:3

 

바울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돌아선 그들이기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이 “믿음의 역사”를 이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_살후1:1

 

 

물론 “믿음의 역사”하면 다른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님께서 다시 돌아서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기 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가 나 자신과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와 우리 교회 가운데 날마다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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