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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첫 교회, 예루살렘 교회

 

‘집에 있는 교회 칼럼’ #175 _첫 교회, 예루살렘 교회

2023년 4월 다섯째 주 칼럼(2023.4.30. ~ 2022.5.6.)

부활절 넷째 주일

 

사도행전 2:43-47

베드로전서 2:18-25

요한복음 10:1-10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세워지는 첫 모습을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세워진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건물이 있는 교회가 아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무리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_행2:41

 

마가다락방에 120명의 신도가 모였습니다.(행1:15)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분부를 따라 신도들이 모여서 약속하신 것을 받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마가다락방에 모인 신도들은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순간이 바로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지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렇게 120명의 신도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열두 사도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참으로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행2:43) 베드로와 사도들이 선포한 오순절 설교로 이 날에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는 자가 만명이 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엄청난 부흥을 맞이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는 더 놀라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럼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_행2:44-45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신도들의 생활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신도들이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서로 통용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유무상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회는 이런 모습이 그려져야 합니다. 현재 주류를 이루는 전통교회에서는 이런 유무상통이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 초대교회에는 이런 유무상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은 초대교회와 시대가 다르니 이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 걸까요?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도의 생활이 서로의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각자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모습입니다. 상상만 해도 너무 멋진 모습입니다. 기도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_행2:46

 

예루살렘교회 신도들은 어디에서 모였을까요?

성경은 예루살렘교회 신도들이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뗐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신도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였을까요? 아닙니다. 예루살렘교회 신도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성전에 모이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렇게 모인 신도들은 성령의 역사를 따라 함께 서로 통용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장소가 됩니다. 이런 예루살렘 신도들의 활동이 후에 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만들게 했습니다. (행4:4)

성전에서 함께 모인 신도들은 각자 집으로 흩어집니다. 신도의 수가 약 만명이었다고 가정하면 열두사도가 흩어져서 살필 신도의 수가 한 사도당 약 천명 정도가 됩니다. 한 가정에 서너가정이 함께 모인다고 생각하면 한 가정교회에 대략 30명이 됩니다. 한 사도가 이러한 30여개의 가정교회를 돌아보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는 그렇게 모이는 30여개의 가정교회을 순회합니다.

 

첫 교회 예루살렘교회는 가정에서 함께 모여서 무엇을 했을까요? 물론 예배를 드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예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은 “집에서 떡을 떼며”라고 기록하는데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은 떡을 떼는 자리였습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곧 식사의 자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떡을 떼며 잔을 나누며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하셨는데 그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사도들은 가정에 모인 신도들에게 예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대로 신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성찬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만찬에 자리에서 식사를 하시고 바로 그 자리에서 성령에 대해 기도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요13-17장) 사도는 이렇게 매일 신도들과 함께 떡을 떼며 식사를 하면서 자신이 경험한 예수의 이야기로 전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성전에 모여 아직 예수를 모르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_행2:47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니 교회 안에 가난한 자가 없었습니다.(행4:34) 이런 모습이 보이니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각 가정의 식사의 자리에 초대를 받습니다. 이들은 각 가정에 모이는 떡을 떼는 자리에 참여하게 되고 구원 받는 사람들이 됩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이런 모습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고 지금도 우기가 회복하고 돌아가야 할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고 각 가정에 모인 신도들은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이렇게 되려면 서로를 위해 더욱 기도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필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교회 신도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골칫덩어리가 됩니다. 예루살렘교회 신도들은 선을 행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신도들의 이러한 행동은 너무도 선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게 됩니다. 결국에는 유대교회의 핍박으로 예루살렘교회는 흩어지게 됩니다. 사도들이 붙잡히고(행4:3), 초대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스데반이 붙잡혀 순교하게 됩니다.(행7장) 이어서 사도 중 한 사람인 야고보도 순교하는 일까지 일어납니다.(행12장) 신도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고 예루살렘을 떠나는 사도가 생겨나고 신도들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앞에서 잠깐 살펴본 것처럼 각 가정에서 모이고 가정교회로 이루어진 교회였기에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가정교회를 세우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핍박과 고난으로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는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고난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이야기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_벧전2:20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걸아가는 길이 됩니다. 초대교회 신도들의 신앙의 모습을 베드로의 서신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_벧전2:23-24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을 행함으로 분명 받게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맞서지 말고 욕을 당한다고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당하되 위협하지 아니합니다.

 

우리 아끈공동체가 걸아가야 할 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첫 교회 예루살렘교회의 본을 따라 가정에서 떡을 떼며 주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 강원도 인제 원통에서 아끈공동체 역사에 의미가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끈공동체 세 번째 교회가 세워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평화교회(가칭)에서 함께 모여서 지내는 시간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기도하기는 강원도 인제에 평화교회(가칭)가 예루살렘교회처럼 세워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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