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교회 칼럼’ #176 _갓난 아기들처럼
2023년 5월 첫째 주 칼럼(2023.5.7. ~ 2022.5.13.)
부활절 다섯째 주일
사도행전 7:55-60
베드로전서 2:2-10
요한복음 14:1-14
예수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합니다. 유월절 음식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유대의 오랜 전통처럼 무교병과 쓴나물과 양고기입니다.(출12:8-9) 유월절 만찬을 위해 12제자와 예수가 한 식탁에 둘러 앉았습니다. 식사를 시작하면서 무교병을 드시더니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네 몸이니 다 받아 먹으라.” 그리고 각자에게 무교병을 찢어 직접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포도주를 잔에 따르시며 말씀합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것을 마시라” 그리고 각자에 잔에 따라 주시고 마시게 하십니다.
너무도 진지한 선생님의 모습에 제자들은 이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지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또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더니 대야에 물을 부으시고 제자들을 한 사람씩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모두 얼떨떨하며 이게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릅니다. 이에 불편해 하는 베드로를 야단까지 치시며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다 씻어주십니다.(요13:1-20)
다시 상에 둘러 앉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작심이라도 한 듯 계속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 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요12:44-50)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13:21-30) 베드로 니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13:36-38) 분위기가 너무도 엄숙하고 진지한데다 계속되는 예수의 이야기에 제자들의 마음은 걱정과 불안으로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_요14:1
예수께서는 언변의 달인이 맞습니다. 그렇게 겁에 질리기 만드시더니 이제는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앞으로 보혜사 성령에 대해 가르쳐주시고 바로 이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주시겠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겁에 질려있던 제자들은 다시 용기를 얻습니다. 이런 예수의 가르침으로 마지막 만찬의 자리는 제자들이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됩니다. 예수께서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라고 분위기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정체성이기에 그렇습니다.
바로 그 중요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도마로 하게 합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_요14:5
사실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이요. 우리가 앞으로 가게 될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질문입니다. 도마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야 할 분명한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_요14:6
“내가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오직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밖에 없음을 말씀합니다. 예수 나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음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거기에 나를 알았더라면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14:7)
아직까지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빌립이 예수께 다시 질문합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_요14:8
예수께서는 앞에서 보여주신 진지하고 두려움에 떨게 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부드럽게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나를 본 자를 아버지를 본 것이란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도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아직 믿지 못하겠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_요14:11
예수께서는 아직도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지금까지 내가 너희에게 보여주고 행한 그 일로 나를 믿으라 권합니다. 이어지는 가르침은 더 놀라운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14:12)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잡혀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제자들은 모두 겁에 질려 마지막 만찬에서 하신 말씀을 모두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모두 도망쳐 버립니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성령이 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가르침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니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예루살렘 전체에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핍박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핍박에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하셨던 바로 그 말씀대로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도 그 누구에게 원망과 불평이 없이 다 받아들이셨던 것처럼 핍박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어떤 원망과 불평이 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그 첫 순교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죽기 전에도 예수께서 하셨던 그 일이 스데반을 통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_행6:8-10
스데반에게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서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고 예수께서 모든 논쟁에서 지혜롭게 하셨던 것처럼 스데반에게도 동일한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데반에게만 일어난 일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동일하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_행7:56
일자 무식이었던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베드로도 똑같이 감당합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가르침은 참으로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서신서에서 너무도 멋지게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지 설명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_벧전 2:9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됩니다.
거룩한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 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고 거룩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하는 자가 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베드로가 우리로 권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_벧전2:2
하나님 앞에 갓난 아기가 되라는 것입니다.
갓난 아기는 부모가 없이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마음 속에 새겨야 합니다.
갓난 아이는 부모의 공급 없이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갓난 아이는 모든 것을 부모의 공급으로 살아갑니다. 절대적 의존입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하나 봅니다.
갓난 아기들은 부모에게서 젖을 갈망합니다. 젖을 주지 않으면 때를 쓰고 울며 젖을 달라 울부짖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기에 매일, 매순간 달라고 때를 쓰며 울부짖어야 합니다. 그냥 주면 다행이고 안주면 말지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때를 쓰며 달라 울부짖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진지하게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과연 나는 갓난 아기처럼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 과연 나는 갓난 아기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지 말입니다.
어린이 보다 더 어린 갓난 아기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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