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교회’ 칼럼 #181 _인애와 긍휼적 삶
2023년 6월 첫째 주 칼럼(2023.6.11. ~ 2022.6.17.)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호세아 6:1-6:6
로마서 4:13-25
마태복음 9:9-13
구약의 선지자 중 주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는 호세아와 아모스입니다. 호세아와 아모스는 모두 비슷한 시기인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 때 활동을 합니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_암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_호1:1
성경 기록상으로 볼 때 호세아(B.C.790-710)가 가장 긴 시간 활동을 했고 그 사이에 함께 활동한 선지자가 아모스(B.C.760-753)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_왕하14:23
여로보암 2세는 41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치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B.C. 793-753)가 통치하던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중근동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 됩니다. 그런데 번영을 누리면 누릴수록 북왕국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점점 더 거만해져서 타락의 길로 빠져듭니다. 이때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이 호세아와 아모스와 요나(왕하14:25)였습니다. 이 세 선지자 중 가장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활동한 선지자가 호세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삶을 통해 북이스라엘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을 하게 하시고 그 과정을 통해 북이스라엘의 음란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호세아서는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한 것처럼 하나님과 북이스라엘 백성의 언약 관계는 결혼관계임을 말씀합니다. 호세아가 간음한 고멜을 용서하고 찾아 나선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북이스라엘을 용서하기 위해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호세아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을 너무 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삶을 살고 있다”였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의 주제 “여호와를 힘써 알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을까요? 아니요! 자신들이 가진 제물들로 충분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따라 종교적 행위로써 제사를 충분히 드렸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_호6:6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 행위로서의 제사나 번제가 아닌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종교적 행위를 앞세우는 일이 그때나 예수의 시대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실 때 세리 마태의 집을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종교적 행위에 심취해 있던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다짜고짜 따집니다. “어째서 니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 같은 놈들하고 밥을 먹느냐?”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_마9:13
예수께서는 종교적 행위로 교만해져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셔서 말씀합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예수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종교적 행위를 우위에 두고 번제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호세아의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외침이 메아리쳐 들려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북이스라엘처럼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처럼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적 행위에 심취해 있습니다. 그것을 해야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마음의 안도의 한 숨을 내쉽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해 말씀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 예수께서도 이 말씀을 다시 떠올리시며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종교적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긍휼과 인애임을 말씀합니다. 사울이 아각을 진멸하고 교만해져서 자신이 빼앗은 제물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면(삼상15장)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사울을 향해 분노하셨습니다. 이때 분명하게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_삼상15:22
성경에 한결같이 관통하는 신학은 율법적 제사의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인애와 긍휼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고 서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것에 대해 로마서를 통해서 율법적 행위와 믿음의 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로 여겨진 것은 율법적 행위인 할례를 행하기 전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끝까지 확신을 가지고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율법적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_롬4:13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율법적 종교적 행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라!
그런데 사람은 계속해서 율법적이고 종교적이 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인애와 긍휼적을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인애”의 사전적 의미는 “어진 마음으로 사랑함”입니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입니다.
너무 분명하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 태도는 되도록 종교적 행위를 버리고 어진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겨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종교적 결정체처럼 여겼던 안식일과 종교적 행위를 거부하시고 인애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2023년 성령의 계절을 살아갈 우리의 모습이 인애와 긍휼적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진정 하나님을 아는 자들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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