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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자

 

‘집에 있는 교회’ 칼럼 #184 _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자

2023년 7월 첫째 주 칼럼(2023.7.2. ~ 2022.7.8.)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예레미야 28:5-9

로마서 6:12-23

마태복음 10:40-42

 

 

예레미야가 활동한 시기는 유다왕 요시야부터 시드기야까지입니다.(렘1:1-3) 이 시기는 남유다가 쇠퇴하고 바벨론에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시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힘들고 아픈 시기에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활동을 합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_렘1:2-3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예언은 첫째로 “남유다가 이렇게 가다간 바벨론에 멸망한다”는 심판이었습니다.(렘25:9) 둘째는 “멸망하지 않으려면 바벨론의 멍에를 메고 바벨론을 섬기는 나라가 되라”였습니다.(렘27:11) 셋째는 “애굽을 절대로 섬기지 말고 바벨론을 섬기라”였습니다.(렘42:14-17)

 

남유다는 예레미야가 활동한 시기에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고집과 자신들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제국 바벨론의 위협 앞에 여러분은 어떻게 했을까요?

바벨론에 섬기며 때가 차기를 기다리는 선택을 하셨겠습니까? 아니면 바벨론에 대항해서 또 다른 제국인 애굽을 등에 업고 싸우는 쪽을 선택하셨겠습니까?

 

예레미야의 심판선포를 듣지 않는 남유다는 왕이 세워질 때마다 두 제국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을 대적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렇게 순종하지 않음으로 예레미야가 활동하는 시기에 무려 세 번이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러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요시야가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를 하고(왕하23:28-30)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그런데 삼개월 만에 애굽 느고에 의해 폐위가 되고 애굽으로 끌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세워진 왕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입니다. 친애굽정책을 펼친 여호야김은 11년간 통치했지만 결국 바벨론에 점령당하고 여호야김은 포로로 끌러가게 됩니다.(왕하23:36-24:7, 대하36:6, 렘52:28) 이것이 1차 바벨론 유수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지만 친애굽 정책을 꿈꿨던 여호야긴은 삼개월만에 다시 바벨론에 의해 점령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왕하24:8-16, 대하36:10, 렘52:29) 이것이 2차 바벨론 유수입니다.

이번에 바벨론은 요시야의 아들을 다시 소환합니다. 여호야긴의 숙부인 맛다니야,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웁니다. 11년간 통치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시 친애굽정책을 펼치게 되면서 바벨론에 맞서게 됩니다. 바벨론 느브갓네살은 이러한 유다를 느부사르단을 보내 완전히 멸망시켜버립니다. 유다와 성전이 모두 파괴되고 3차 바벨론 유수가 시작 됩니다.(왕하25:8-21, 렘52:30)

 

예레미야 28장은 시드기야왕 4년에 일어난 선지자 하나냐와의 대결을 담고 있습니다. 시드기야 4년은 이미 두 번의 바벨론 유수를 경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애굽이 아닌 바벨론을 선택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벨론에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모두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선지자 하나냐는 예레미야와 반대되는 예언을 합니다. 이 예언은 남유다 왕과 남유다가 원하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평화를 예언합니다.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어버리셨고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여호야긴 왕과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니라” _렘28:4

 

이때 예레미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렘28:9)

두 선지자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냐의 말을 듣기 원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하나냐의 말을 환영하며 들을 때 예레미야는 성전을 떠나 자기의 길을 갑니다.(렘28:11)

 

두 선지자 하나냐와 예레미야 중 어떤 선지자를 선택하는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답을 예수께서 해 주십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_마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그 선지자의 상을 받게 됩니다. 선지자 하나냐의 말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하나냐의 상을 받게 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예레미야의 상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정말 안타깝게도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들은 하나냐의 말을 믿고 영접함으로 멸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 예레미야의 말을 믿고 영접했더라면 유다에 이런 멸망이 없었겠지요.

그 다음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은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무슨 말씀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 다음 구절까지 보면 좀 더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_마10:42

 

예수께서 생각하시고 말씀하신 ‘의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잘 믿어서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제사장입니까? 율법이라면 하나라도 땅에 떨어질랴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다하는 목사일까요? 새벽기도회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교회의 모든 예배와 주일성수에 목숨을 거는 그리스도인일까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인은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제자의 이름으로” 자기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다른 예수를 믿는 사람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행할 때 진정한 의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고 도움을 줄 때에 자기 이름이 아닌 타인의 이름으로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끈공동체에 지정연보를 두었습니다. 선교사를 도울 때도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줄 때에도 나의 이름은 감추고 교회의 이름으로 돕는 손길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산성설교를 통해 구제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_마6:3-4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 의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종교성을 가지는 것으로 잘못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감추고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율법 아래 있고, 법 아래에 있는 것은 죄의 종이 되는 것임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_롬6:15

 

우리 모두는 죄의 종이 아닌 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의의 종이 될 때에 거룩함에 이르게 됩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_롬6:19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의에게 종으로 내주는 것이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이름이 아닌 타인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 주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한 번 여러분 각자의 모습 속에서 질문해 보십시오. 누군가를 도와줄 때 자신의 이름으로 했습니까? 타인의 이름으로 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열심히 쫓아가는 것은 죄의 종이 되는 길입니다. 참 신기하게 그렇게 종교적이고 율법적으로 살아가면 어느 순간 이것이 쌓이면 자신이 판단자가 되어 자신보다 더 연약하고 작은 자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 모두는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자가 왜 의인이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마태복음 25장에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마25:35-40)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_마25:35-40

 

오른편에 선 양무리인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합니다. “내가 주릴 때, 내가 목마를 때,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내가 헐벗었을 때, 내가 병들었을 때,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자가 곧 예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준다는 것은 예수께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이 됩니다.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자는 진정 예수를 섬기는 자가 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섬기는 자가 됩니다. 그렇기에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자는 의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구원 받는 성도가 되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오직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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