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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장터에 앉은 아이들

 

‘집에 있는 교회’ 칼럼 #185 _장터에 앉은 아이들

2023년 7월 둘째 주 칼럼(2023.7.9. ~ 2022.7.15.)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

 

스가랴 9:9-12

로마서 7:15-25

마태복음 11:16-19

 

마태복음 11장 16-19절에는 재미있는 비유가 나옵니다. ‘이 세대’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얼핏보기에 잘 이해하기가 어려운 비유이기도 합니다. ‘장터의 아이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세대가 ‘장터의 아이들’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_마11:16-17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장터의 아이들의 특징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의 시대에 장터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장터 모습을 생각해 보면 장터는 희노애락이 모두 깃들어진 곳입니다. 무엇보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고 주위에 모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주위에 소문은 장터에서 알게 됩니다. 이 장터에 모여서 노는 아이들은 모든 동네에서 모여든 아이들입니다. 모든 게 신기하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입니다. 천진난만한 장터의 아이들은 광장에서 벌어지는 공연에 함께 참여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흥겨운 피리 소리에 춤도 추고, 슬픈 이야기가 나오면 울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원래 장터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습니다. 아무리 슬픈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습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장터 아이들입니다.

즐겁든 슬프든 어느 한 가지에 반응해야 하는데 이 세대는 어느 것하나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며 관찰자가 되어 “잘 하고 있나? 머 잘못하는 거 없나?” 관찰할 뿐입니다. 자신이 함께 참여하지 않고 그저 관찰자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알려주신 내용을 통해 보면 세례요한과 인자의 모습은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마치 장터에서 공연이 벌어지고 피리의 흥에 즐거운 것과 슬픈 장터 공연에 눈물바다가 되는 것과 같이 완전히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습니다.(마3:4) 보통 유다사람들이 먹던 빵도 아니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입는 옷도 낙타털옷을 입을 정도입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사람의 모습처럼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세례요한은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로 그들에게 물세례를 베풀고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종교 정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은 모두 세례요한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고 귀신이 들렸다고 했고 결국에는 옥에 가두고 죽였습니다.

반면 예수께서는 세례요한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먹는 것은 모두 다 먹고 즐겼습니다. 만나는 사람과 세리든 죄인이든 구별하지 않으시고 모두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겼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예수를 향해 손가락질 합니다. “에이 퇘~~ 더럽게 세리, 죄인들의 친구로구만”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달아 죽입니다.

 

이 세대는 무엇을 하든 판단자가 되어서 판단합니다. 즐겁고 기쁜 소식을 들어도 웃지 않고 슬픈 이야기를 들어도 울지 않습니다.

 

스가랴를 통해 오실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가게 되실 것을 예언합니다.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귀 어미도 아니고 멋진 말도 아니고 볼품없는 나귀새끼입니다. 심지어는 한 번도 등에 물건을 실어보지 않은 나귀새끼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나귀새끼가 성인을 등에 업고 갈 수 있을까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_슥9:9

 

이 세대에 속한 사람,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의 이 모습을 보고 절대로 기뻐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저 처량한 모습 좀 보소! 할 짓이 없어 저 불쌍한 나귀새끼 등에 타고 가나!” 온갖 판단과 부정과 비판으로 손가락질합니다.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오는 모습은 예언의 성취이자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는 놀라운 광경입니다. 한 번도 등에 짐을 실어보지 않은 나귀새끼는 성인을 등에 태우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타셨던 그 나귀새끼는 얌전히 예수를 등에 업고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들어갑니다. 또한 나귀새끼를 타고 가시는 예수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발이 땅에 닿을 듯 말 듯! 불안한 모습으로 새끼 나귀 등에 업혀 가는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하셔서 그 일을 이루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이 이렇게 판단자가 되어 무엇을 보든 꼬아서 보고 비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_롬7:21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_롬7:23

 

바울사도는 어느 순간 그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죄의 법’, ‘율법’을 따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그것에 사로잡히는 순간 죄의 법 아래에 거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 죄의 법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이 올무가 되어 죄의 법을 따르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깨달은 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데 내 안에 악이 함께 있어서 그 죄의 법이 때로는 나를 사로잡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_롬7:24

 

그런 자신을 보며 바울도 한탄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사이에서 계속해서 싸우는 인생이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능히 즐거움과 슬픔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장터에 앉은 천진난만한 아이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며 삶을 즐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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