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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당신의 가진 짐은?

 

‘집에 있는 교회’ 칼럼 #233 _당신이 가진 짐은?

2024년 6월 다섯째 주 칼럼(2024.6.30. ~ 2024.7.6.)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

 

애 3:21-33

고린도후서 8:7-15

마가복음 5:21-43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왜 이리도 힘겨운 일이 계속해서 생기는지! 한 분 한 분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렵지 않은 사람이 없다. 집집마다 다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그 문제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분명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모든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신데 왜 우리에게 고통의 문제를 안겨주시는 것일까? 도대체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일까?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_애3:23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십니다.” 이 고백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이다. 그런데 지금 처한 예레미야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고 성전은 파괴되고 왕족 귀족 등 쓸만한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끌러갔다. 나라의 멸망을 보고 그 누구보다 애통 해 했던 사람이 예레미야다. 예레미야는 기울어져가는 유다를 향해 계속해서 다시 돌아올 것을 외쳤던 선지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다시 돌아서지 못한 유다가 결국 바벨론에 멸망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선지자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나라의 멸망 앞에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라의 멸망 앞에 슬퍼하며 부르는 노래 ‘예레미야 애가’이다. 애가의 전반부 1장부터 3장 20절까지는 나라가 멸망한 현 상황에 대해 기록한다. 비참하고 참혹한 상황을 묘사한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나라의 멸망이라는 엄청한 고통 앞에 그냥 좌절하지 않는다. 3장 21장부터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나라 유다를 멸망하게 하셨는지를 깨닫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고통은 그대로이지만 이 고통을 주신 하나님을 향해 고백한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_애3:21-24

 

예레미야는 이 고통의 순간을 직시하고 받아들인다. 그랬더니 오히려 소망을 발견하게 된다. 나라는 멸망했지만 모든 것이 진멸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남겨 두셨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나의 기업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 인생에게 여러 모양의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을 주시고 근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님을 예레미야는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근심하고 힘들게 하기 위해 고통을 주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무궁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시기 위해 잠깐 고통 가운데 있게 하신다.

 

12년 동안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혈루증에 걸린 한 여인과 딸의 죽을 병에 걸려 고통 가운데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가족이 있다. 이들의 고통을 우리가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복음서에는 이 두 사건을 하나의 스토리로 묶는다.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딸이 죽게 된 것을 보고 급하게 예수께 찾아간다.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곡히 도움을 요청한다. 한시가 급한 다급한 야이로이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에 가는 길에 예수께서는 곧바로 가지 않으시고 한 여인을 만나시고 시간을 허비하신다.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한시가 급한 야이로에게는 원망의 순간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이 한 여인에게는 기쁨과 환희의 시간이다. 예수의 옷깃만 닿을 뿐인데 12년 동안 고통을 주었는 혈루가 마르고 치유된다. 예수께서는 그런 혈루증 여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_막5:34

 

혈루증이라는 고통과 어려움이 자신을 구원하는 통로가 된다. 만약 혈루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이 여인은 예수를 찾지도 않았을 것이고 구원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답답한 가운데 있던 야이로는 혈루증 여인으로 인해 지체되어 집에 도착하니 이미 딸은 죽은 후였다. 회당장으로써 예수를 찾아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예수를 찾아갔건만 예수께서 서둘러 오시지 않음으로 딸이 죽게 되었다. 집에 가까워질 때 들리는 통곡소리에 야이로의 마음에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죽은 딸을 보며 통곡하며 우는 야이로에게 예수께서는 반전의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_막5:39

 

야이로와 그의 가족 그리고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예수를 비웃는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는 야이로와 그의 가족,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아이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 소녀가 일어나 걷는다. 딸의 죽음이라는 고통이 야이로의 가족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

야이로의 딸이 태어났을 때 혈루증 여인은 혈루증이라는 병에 걸려 고통이 시작되었고 야이로의 딸은 12살의 나이에 죽음이라는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야이로는 예수께서 자신의 딸을 다시 살려주신 것을 생각하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고 부끄러운지 깨닫는다. 자신이 딸과 함께 살아온 세월을 한 여인은 혈루증이라는 고통 가운데 살았을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 한 가득이다.

 

인생에 있어서 서로를 헤아리고 살펴보는 것은 참 귀한 마음이다. 특히 초대교회에서는 이렇게 서로를 살피고 돌보는 일이 많았다. 바울사도가 세운 여러 교회들은 연보를 모아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도 하였다. 선교여행을 다니는 바울사도에게 자신들이 모은 연보를 보내기도 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_고후8:1

 

특히 바울이 연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서로의 균등을 이루는 것임을 강조한다. 서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것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교회공동체의 모습이다. 아끈공동체에 연보 중 ‘지정연보’가 있다. 바로 이 ‘지정연보’가 이런 의미에서 만든 것이다. 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돕기보다 교회의 이름으로 좀 더 어려움에 처한 이들과 주님의 일을 위해 힘쓰는 이들을 위해, 물질의 억압으로 고통 가운데 이들을 위해 흘려보내기 위한 연보이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돕는 것이다.

연보에는 ‘심음의 법칙’이 적용된다. 심은대로 거두는 성경에 기록된 원리이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_고후8:1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_갈6:2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고통과 어려움 주시는 중요한 이유 중 한 가지를 알게 된다. 바로 서로 짐을 지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각자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서로 돕고 위로 하게 함으로 공동체를 세워가게 하신다.

 

예레미야는 나라의 멸망이라는 큰 고통 앞에 혼자만 절망 가운데 빠져 있지 않고 슬픔의 노래를 부르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위로를 주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서로를 돌아보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함께 짊어져 보는 거다. 모두가 가기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이라는 짐을 함께 짊어지고 걸어가 보는 거다. 그래서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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