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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이웃사랑과 하나님사랑의 관계

2021년 5월 첫째 주 칼럼(2021.5.2. ~ 2021.5.8.)

부활절 다섯 째주 주일성서일과

 

사도행8:26-40

시편22:25-31

요한일서4:7-21

요한복음15:1-8

 

 

사도행전에는 대부분 베드로(1-11장)와 바울(12-28장)의 이야기로 전개가 됩니다. 그런데 중간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일곱집사로 뽑혔던 스데반과 빌립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는 ‘빌립’이 등장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_행6:5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_행8:26

 

일곱집사 중 가장 많은 이야기가 기록된 사람은 빌립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일곱집사를 선출, 8장에 사마리아 복음전파,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에게 세례, 21장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을 만류했던 이야기 등 사도행전에는 참 많은 빌립집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 부활절 다섯째 주 성서일과 말씀은 7장에 기록된 두 번째 사건인 광야에서 만난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에게 세례를 주는 이야기입니다.

 

사울을 필두로 하여 예루살렘교회는 핍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 핍박을 피해 빌립이 선택한 곳은 사마리아였습니다. 모두가 가기 꺼려했던 곳을 선택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_행8:5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빌립을 통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사도들이 듣고 사마리아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확인하러 올 정도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빌립집사를 통해 일어납니다. 그 후 다시 빌립집사가 향한 곳은 ‘광야’였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_행8:26

 

먼저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빌립이 선택해서 가는 곳이 어디인가입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가장 꺼려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빌립이 또 선택해서 간 곳은 ‘광야’입니다. 광야로 갈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더 힘든 곳으로 향합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그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더 낮은 곳으로, 더 힘든 곳으로 향한 빌립입니다. 빌립의 이 선택으로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를 만나게 되고 간다게는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놀랍게 아프리카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간다게의 영향으로 에디오피아는 기독교 중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에디오피아는 아프키라 중동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위쪽으로 바다건너 아라비아반도가 접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모두 이슬람 국가들입니다. 이슬람교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에디오피아가 이슬람교의 남하를 조금이나마 저지하고 있는 샘입니다.

 

빌립집사의 이러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사마리아인 일지라도, 아프리카 에디오피아 사람일지라도 빌립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_요일4:11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너무도 어려운 이들을 기꺼이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_요일4:20

 

요한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만일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말씀은 4장 20절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면서 누군가를 계속해서 미워합니다. 우리는 계속 잊어버립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혼자 자기 암시로 되새길 뿐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해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의 좋은 비유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와 같습니다. 서로 사랑할 때 가지는 포도나무에 딱 달라붙어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됩니다.

 

빌립집사가 사마리아인을 사랑했더니 포도나무에 가지가 딱 달라붙어서 열매가 맺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 에디오피아 사람을 사랑했더니 포도나무에 가지가 딱 달라붙어 열매가 맺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_요15:5

 

어쩌면 너무도 간단하고 다 알고 있는 대답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열매가 맺어집니다. 절대로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세요.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대답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잘 하고 있기는 한 것입니까? 너무도 당연한 일 말을 우리는 잘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제 각자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는지 살펴봅시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있었고, 포도나무 가지에 붙어서 열매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서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순간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주님과 한 몸이 되면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리스토넬레스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따져본다면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충분조건이 되는 셈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의 필요조건이 됩니다. 이웃사랑 없이는 하나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이루어가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 이웃을 어떤 사람이건, 원수이건, 사마리아인이건, 아프리카 사람이건 사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