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교회 칼럼’ #84_ 절망에 빠지다.
2021년 6월 넷째 주 칼럼(2021.6.27. ~ 2021.7.3.)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성서일과
예레미야 애가 3:22-33
고린도후서 8:7-15
마가복음 5:21-43
2021년은 625전쟁 7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70여년 동안 조국이 분단되어 있기에 그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같은 민족이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아픈 역사입니다. 그때는 한반도에 사는 모두에게 절망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절망’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미얀마는 쿠데타에 반대하며 ‘절망’ 그 자체인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절망의 순간에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말씀 속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조국의 멸망 앞에서 목놓아 우는 한 선지자의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나라의 멸망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은 없을 것입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서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_애1:1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하기 전부터 위정자들을 향해 계속해서 경고를 날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경고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나라가 멸망하고 맙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가 겪었어야할 아픔은 더욱 컸습니다.
우리는 또 한 명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열 두 살 된 딸의 죽음을 바라보는 아빠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빠의 마음이 어떠할까요?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입니다. 마가복음 5장 21-43절은 딸이 죽어가는 절망 앞에서 몸부림치는 한 아빠,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입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_막5:22-23
회당장임에도 얼마나 그 절망의 늪이 깊었으면 회당장 모두가 적대시하는 예수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간곡히 구합니다. “제발!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마가복음 5장 21-43절에서는 또 한 명의 절망의 순간을 걸어가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_막5:25-26
12년 동안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갑니다. 그런데 오히려 괴로움만 받고 돌아옵니다. 유명한 의원도 다 찾아갑니다. 가진 것 모두 탕진할 정도로 절박한 그녀입니다. 절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닥쳐옵니다. 이 절망의 고리를 끊어버려야 하는데 끊을 수가 없습니다.
절망의 순간을 우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절망에 빠져있는 본인 자신이 이 절망을 어떻게 다루는지, 두 번째는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을 도울 때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하는지입니다. 먼저는 본인의 태도가 중요하고 두 번째는 도움의 손길이 중요합니다.
예레미야, 회당장 야이로, 열두해 혈루증여인, 이들은 절망 속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있을 때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주님께 나오는 것, 그것이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히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_애3:21-22
나라가 멸망하는 절망의 순간에 엄청난 고통이 찾아와서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가기가 두렵지만 그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니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이 소망이 되고 주님의 성실하심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회당장으로 예수께 나아가가는 것이 그 누구보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주님께 나아갔다니 죽었던 자신의 딸을 예수께서 살려내셨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망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몸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며 모든 치욕을 다 겪습니다. 어쩌면 대인기피증이 그녀를 더욱 절망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지 모릅니다. 하지만 절망 속에 있던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도 힘들게 만들었던 사람들 속으로 다시 뛰어듭니다.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나을 수 있을 거라는 한 가닥 희망의 불씨를 피웁니다. 이 절망에 빠진 여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렇게 먼저 절망에 빠진 본인의 의지와 태도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절망의 순간에 자신의 힘으로 모두 이겨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절망에 빠진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와 행동이 중요합니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도울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원리에 대해 바울 사도는 연보를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너무도 중요한 우리의 태도와 원리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_고후8:13-14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절망에 빠진 사람과 일반 사람 사이에는 일종의 불균형이 존재하게 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이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셨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을 때 마음의 불균형을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 균등하게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 딸의 죽음이라는 불균등이 찾아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불균등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열두해 혈루증으로 고통받는 여인에게 혈루증이라는 병은 엄청난 불균등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불균등을 해결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돕게 된다면 가장 먼저 그들 스스로가 주님께 나아옴으로 이 절망이라는 불균형을 해결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옆에서 돕는 자로서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 원인들을 찾아 도울 수 있다면 균등하게 만들어야 하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그 원인을 균등하게 만드는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이 땅에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균등의 나라입니다. 온 세상이 편만하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많이 가진 자는 적게 가진 자에게로 흘러가서 서로 균등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물질 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절망과 같은 불균등하게 만드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도 사실 불균등을 균등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유무상통했던 것도 균등하게 만들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원리입니다.
절망이라는 것이 우리를 불균등하게 할지라도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 균등을 이루어가는 이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서로에게 얼마나 힘이되고 살맛나는 세상이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