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교회 칼럼’ #118 _ 새로운 피조물
2022년 3월 넷째 주 칼럼(2022.3.27. ~ 2022.4.2.)
사순절 넷째 주일
여호수아 5:9-12
고린도후서 5:16-21
누가복음 15:1-3,11-3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_눅 15:1-3
예수께서는 가는 곳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은혜를 입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나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떻게 든 예수의 말과 행동 속에서 흠집을 잡으려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대제사장 무리들입니다.
이번에도 예수를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무리들과 함께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핍니다. 자기들에게 거리끼는 것 하나를 발견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트집을 잡습니다. 예수께서도 그들의 이러한 트집을 들으시고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이어갑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비유로 가르칩니다.
이 비유는 공통적으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 이 세 가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비유를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잃어버린 것’은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잃어버린 것’은 누구를 비유하는 것입니까?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세리와 죄인들의 무리들이 ‘잃어버린 것’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께서 찾는 잃어버린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함께 하신 사람들은 세리, 죄인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두 번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본인이 ‘잃어버린 자들’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야웨의 신앙으로 살아가려고 애는 쓰지만 길을 잃어버리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잃어버린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이 잃어버린 비유를 통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잘못 들어선 길을 돌아서 하나님께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지난 주에도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선 줄로 생각했다가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는 양과 같아서 쉽게 길을 잃어버리고 헤메이기 일수입니다. 이 비유를 듣는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길을 잃고 헤메일 때 내가 길을 잃은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한참을 헤메고 만신창이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과정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돌아서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를 깨닫지 못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더 악랄하고 독기를 품고 끝까지 잃어버린 길에서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길을 잃은 순간을 빨리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바른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가정교회는 잃어버렸던 길에서 다시 돌아온 새 길이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여러 교회의 모습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그 전통을 통해서 교회가 온전히 세워질 수 있음을 사도들을 통해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러한 사람 중심의 가정교회의 모습을 역사 속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져오게 하셨습니다. 그 역사의 흐름에 저희는 잘 올라타서 함께 가고 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전 중심의 야웨신앙이 존재했습니다. 그것도 분명 그 시대 가운데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시대는 만나시대였습니다. 분명 만나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뒤부터 만나의 시대는 종식됐습니다.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는 시대가 시작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_눅 15:1-3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성전시대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후부터는 성전중심의 시대는 종식이 되고 건물이 아닌 사람 중심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사람 중심으로 모이는 곳은 가정이 되고 가정에서 교회의 모임이 이루어집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_고후5:1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은 존재 자체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 원인들로 인해 어그러졌던 모습이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교회에 적용해 본다면 여러 역사적 상황들로 인해 예수와 제자들을 통해서 세워졌전 사람 중심의 교회가 다시 건물 중심으로 회귀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통찰을 깨닫는 순간 원래의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의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인데 마치 새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것이 주님 안에서 느끼는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면 새 것처럼 느껴집니다. 죄악 가운데 있다가 회개하고 회복하면 새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매일 매일 새로운 피조물로 새사람으로 감사와 기쁨의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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