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교회 칼럼’ #130 _그 어떤 것도 사람을 앞서지 않게
2022년 6월 셋째 주 칼럼(2022.6.19. ~ 2022.6.25.)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이사야 65:1-9
갈라디아서 3:23-29
누가복음 8:26-39
누가복음 8장은 누가복음을 전체 구조로 볼 때 변화산 사건 이후 예루살렘 상경기가 시작되는데 상경기 바로 전에 누가의 신학이 농축되어 사건들을 기록한 느낌을 받습니다.
여인들의 활동 – 네 가지 땅 비유 – 등불 비유 – 참 가족 – 물결 잔잔 – 군대 귀신 – 야이로의 딸 치유 – 혈루증여인 치유
네 개의 복음서를 이야기 할 때 에스겔이 환상을 볼 때 나타난 네 개의 얼굴을 비유합니다. 사람, 사자, 소, 독수리입니다. 각 복음서의 특징을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마태복음을 사자복음서, 마가복음을 소복음서, 누가복음을 사람복음서, 요한복음을 독수리복음서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사람복음서라는 신학적 특징을 가집니다. 8장은 바로 이 누가의 신학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어느 복음서 저자도 예수께서 다니실 때 여인들이 도와주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누가는 여인들이 어떻게 도왔는지 이야기 합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야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_눅8:2-3
특히 22-56절에는 네 가지 기적들이 기록되고 있는데 이 기적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잘 보여주고, 무엇보다 사람들을 향해 사랑을 베푸시는 내적인 묘사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26-39절은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고치시는 기적이 기록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군대 귀신들린 한 사람을 고치시기 위해 돼지 떼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한 영혼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 영혼의 생명보다 당장 자신들에게 손해가 얼마가 되었는지를 계산합니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_눅8:37
크게 두려워할 분을 보고 오히려 떠나기를 바라는 거라사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요? 마가복음에서는 돼지 떼가 무려 2,000마리가 되는 떼라고 말합니다.(막5:13) 거라사인 사람들에게 2,000마리의 돼지가 한꺼번에 몰사 당했으니 그 피해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근방에 있는 사람들도 이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오시게 되면 이런 큰 피해를 입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예수가 오시기를 꺼려하고 떠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 떠오르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하나를 구하려다가 거라사인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천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죽게 만든 것은 너무한게 아닌가? 돼지 떼를 죽게 하지 않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는 방법은 없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다른 어떤 것보다 귀신들린 한 사람을 그 만큼 사랑하신 예수의 마음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99마리 양은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을 떠올린다면 더 이해하기가 쉬울 수도 있겠습니다. 좀 더 살펴보면 예수께서 이렇게까지 하신 이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 놀라운 일이 귀신들린 사람과 거라사인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앞에서 한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방식대로 귀신들린 사람을 포기하고 거라사인 사람들에게 곧바로 갔더라면 어쩌면 배타심이 많은 거라사인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기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거라사인 사람들의 원대로 그곳을 떠나가셨지만 예수께서 사랑하셔서 고쳐주신 귀신들린 한 사람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거라사인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 전합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_눅8:39
2,000마리의 돼지 떼가 아깝지만 그것으로 인해 거라사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게 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이라는 틀 안에 계셨더라면 귀신들린 자에게 가까이 가지도 않으셨을테고 거라사인 지방으로 가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이 우리에게 들어온 후부터는 율법이라는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_갈3:25
저는 율법이라는 틀이 교묘하게 현대적 모양으로 탈바꿈하여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건물이라는 틀이 그것이고 그 틀 안에 있으면 종교적 행위가 율법이 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께서는 율법이라는 초등교사의 틀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2,000마리의 돼지 떼, 지금으로 한다면 돈과 물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한 사람이 거라사인 사람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사람보다 종교적 행위를 앞세우는 유대인들이나 사람보다 교회의 프로그램을 앞세우는 기독교인이나 어쩌면 너무도 똑같은 모습일지 모릅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_사65:2-3
이사야 65장 2-3절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해 본다면 새벽기도회를 잘 참석하는 사람, 공예배를 빠지지 않고 다 참석하는 사람을 이상하죠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종교적 행위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백성이어야 합니다.
명심하고 또 명심합시다. 사람을 먼저, 사람을 먼저 사랑합시다. 그 어떤 것도 사람을 앞서지 않게 우리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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