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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집에 있는 교회 칼럼’ #131 _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2022년 6월 넷째 주 칼럼(2022.6.26. ~ 2022.7.2.)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

 

열왕기상 19:15-21

갈라디아서 5:1,13-25

누가복음 9:51-62

 

 

열왕기상 19장 15-18절은 마지막 엘리야에게 주어진 미션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것은 ‘기름부음’입니다. 세명에게 기름 부음을 명하십니다. 하사엘을 기름 부어 아람 왕으로 세우게 하시고 예후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시고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 선지자로 세우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_왕상19:15-16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엘리야는 엄청난 고뇌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갈멜산 대결에서 850명에 이르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모두 무찌르고 아합 왕과 이세벨을 피하여 도망칩니다. 그 때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신만 남았다고 한탄하며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간구하지만 듣지 못합니다. 엘리야와 같은 대 선지자도 탈진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그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마지막 명령과 함께 자신만 남았다는 한탄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먼저 엘리야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십니다. 하사엘, 예후,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십니다. 그리고 너만 남았다고 생각하는데 너 외에도 7,000명이나 하나님의 사람을 남겨 놓았다는 위로의 말씀을 줍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_왕상19:18

 

왜 하나님께서는 세 사람을 기름 부으셨을까요? 세 사람을 살펴보면 한 사람은 이방인으로 아람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북이스라엘 사람이지만 기존의 왕권을 정복해서 왕이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소를 끌고 농사 짓던 사람입니다. 어찌보면 세 사람 모두 의문이 들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과연 기름부음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

 

엘리야는 왜 이들에게 기름을 부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고 다시 물을 수도 있었지만 먼저 자신이 의문을 가졌던 부분(저 혼자만 남았습니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하사엘과 예후, 엘리사를 기름부음으로 왕으로 선지자로 세워지고 이들은 각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하고 싶으신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문제는 이들 중 두 사람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에 대한 초심을 잃어버렸고 오직 엘리사 한 사람만이 기름부음 받은 자로 끝까지 세워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름부음’ 이 후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참으로 많이 해 왔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름부으심이 의미가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기름부으심은 인치심을 받는 사건이기에 너무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일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면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사도는 ‘성령의 열매’라고 지칭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9가지의 성령의 열매를 말하는데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렇게 9가지의 성령의 열매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_갈 5:22-23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사모하고 이 9가지의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질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 합니다. 물론 신경을 쓰고 살피는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과 경험과 다른 지식과 지혜로 하려고 할 때에는 쉽게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_눅 9:51

 

예수께서 마지막 사명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십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서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대화를 통해 사마리아인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_요 4:28-30

 

요한복음은 예수의 공생애 3년을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합니다. 이 관점으로 요한복음을 볼 때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시점이 예수 공생애 첫 해 초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을 볼 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기에 다시 사마리아를 찾은 것은 예수의 공생애 3년째 되는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공생애 첫 해 초반에 사마리아 마을을 지나가셨고 3년이 지나고 나서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또 한번 지나십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살던 마을과 동일한 마을일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와 함께 교제했던 사건은 분명 사마리아 지역에서 큰 이슈가 되고 영향을 끼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돌아와 오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 보면 예수를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 그 여인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예수께 나아온 사마리아인들은 분명 기름부으심을 받고 믿음의 사람들로 거듭납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일행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지금까지 살펴본 관점으로 분다면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을 듯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하사엘과 예후처럼 끝까지 기름부으심으로 가졌던 초심을 잃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하사엘과 예후와 사마리아인들이 기름부으심을 받은 대로 그 마음을 간직하면서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지도록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기도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지 못한 이유에 대해 57-62절에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먼저 묻는 자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권면하지만 여러 다른 이유를 듭니다. 기름부으심에도 성령의 열매가 그들에서 풍성히 맺혀지지 않은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서 오래참음, 충성의 열매가 잘 맺혀졌더라면 어땠을까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한 번의 기름부으심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의 열매가 지속적으로 맺혀지고 더 풍성히 맺혀지기를 사모하면서 우리의 눈으로 열매가 맺혀지는 것을 바라봅시다. 그래서 하사엘과 예후와 사마리아인들과 같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