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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하나님과의 소통 '기도'

 

‘집에 있는 교회 칼럼’ #135 _하나님과의 소통 [기도]

 

2022년 7월 넷째 주 칼럼(2022.7.24. ~ 2022.7.30.)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 주일

 

창세기 18:20-32

골로새서 2:6-15

누가복음 11:1-13

 

 

하나님 나라는 그 백성이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대로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며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으신가요?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_창18:22-23

 

창세기 18장 22절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명이 손님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소돔으로 향해 갑니다. 사실은 소돔은 조카 롯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손님들에게 자신의 조카의 안부를 물어달라는 부탁을 전했을지 모릅니다. 소돔은 아브라함에게 관심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떠나고 기도하는 중 하나님께서 천청벽력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_창18:17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_창18:17

 

벗인 너 아브라함에게는 숨기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며 소돔과 고모라에 죄악이 가득 차서 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소돔에는 조카 롯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아브라함은 다급한 마음에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합니다. 이 기도는 짧은 구절에 걸쳐서 기록되지만 긴 시간동안 드려진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은 6번에 걸쳐서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의인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 차례로 찾으면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의인 50명을 찾으면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50명을 찾으나 찾을 수 없습니다. 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다시 간구합니다. 의인 45명이 있으면 용서해 주시길 기도하고 또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또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6번에 걸쳐서 기도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아브라함의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도 아니요 소돔과 고모라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과 조카 롯을 향한 기도입니다.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이지만 아브라함이 바라는 대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중보기도는 정말 응답되지 않은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응답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이 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 것 뿐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할 기도, 해야 할 기도가 따로 정해져 있을까요?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설명까지 해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에 대한 설명은 워낙 많이 들어보신 부분이라 생략하고 주기도에 이어서 덧붙여서 설명하신 부분을 살펴보겠숩나다.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주님의 기도를 말씀하시고 기도에 대해 설명하시기 위해 한 가지 예화를 말씀해 주십니다.

“벗이 여행 중 밤중에 찾아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간청한다. 밤 중이어서 늦었다고 쫓아낼 수 없고 벗됨으로 인해 먹을 것을 주지 않겠느냐” 말씀합니다. 아무리 무례하고 필요없고 말도 안되는 기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무엇이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이 말씀까지 하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_눅11:9-10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강조해서 말씀합니다. 이 말은 제발 나에게 무엇이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수시로 바로 바로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도움이 필요할 때,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나 자신이 내가 바라는 대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의 소돔과 고모라의 기도에 아브라함이 바라는대로 응답하지 않으신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소돔과 고모라가 그 죄값을 받고 멸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기도가 다 응답되지 않는데 도대체 왜 그런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_눅11:13

 

우리의 모든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물론 그 응답의 시기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응답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기에 그렇습니다.

 

저희 첫째 우림이는 인도네시아 바탐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서 기어다니기 시작할 때입니다. 제가 사과를 깎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림이가 기어 와서 칼을 달라고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칼이 아이에게 위험한 것이니 피해서 주지 않았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사과를 우림이에게 주었습니다. 사과를 받아든 우림이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우림이는 언제 내가 이런 걸 원했냐는 듯이 사과를 내 던져버렸습니다. 분명 우림이의 칼을 달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좋을 것을 우림이에게 주었지만 우림이는 그것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모습이 이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항하지 않기를 위해 의인을 찾으면서 기도했지만 아브라함의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칼을 달라는 우림이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그것을 주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성령의 깨우치심과 민간함이 필요합니다. 나의 기도에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이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포장하려 하고 무엇이 성령의 역사인지를 잘 깨우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잘못된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권면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_골2:8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일 때가 참 많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성령 충만한 삶의 모습인지와 역사인지를 잘 살피고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잘못된 성령의 임재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순복음의 영향으로 인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김교신 선생님의 분별력 있는 대응이 큰 깨우침을 줍니다. 김교신 선생님은 분위기와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적인 부분을 멀리합니다. 그래서 되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감정의 인도함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감정에 취한 찬양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기도에 힘 쓰돼, 감정에 취하지 않도록 합니다.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힘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올바른 성경해석과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춰야 하고 이성적 능력을 키우기 위해 성서연구, 역사연구, 사회참여에 힘을 기울입니다. 특히 이러한 분별력 있는 행동은 가정교회가 걸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새 이단처럼 변질 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소그룹으로 모일수록 더욱 성경연구와 역사의식을 바르게 가져가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어그러진 기도를 이제 다시 세우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과 마음껏 소통하면서 그 가운데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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