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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믿음의 진보

 

‘집에 있는 교회’ 칼럼 #191 _믿음의 진보

2023년 8월 셋째 주 칼럼(2023.8.20. ~ 2022.8.26.)

성령강림절 후 열둘째 주일

 

이사야 56:1-8

로마서 11:29-32

마태복음 15:21-28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하시고 이스라엘을 넘어 새로운 곳으로 간 것에 대해 기록합니다.

두로와 시돈지방입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대한 사역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_마15:21

 

 

 

두로와 시돈은 한 때 독립왕국으로 번영을 누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지중해 연안 도시로 무역항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에 이어 알렉산더에 함락 당하며 헬라 문화에 유입됩니다. 예수시대인 로마시대에는 수리아의 관할 아래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은 ‘두로와 시돈’, 마가복음은 ‘두로’라고 언급합니다. 이것으로 좀 더 정확하게 예수께서 두로지역에 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만난 여인을 마태복음은 ‘가나안 여자’, 마가복음은 ‘헬라인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보다 마가복음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두 복음서가 다른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라 같은 여인을 다르게 표현합니다. 가나안 여자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이방 여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두로 시돈지역 사람들은 이스라엘과는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무역항으로 지중해 해상무역이 성황하는 곳으로 이스라엘 갈릴리지역 사람들보다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_마15:22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_막7:26

 

 

게다가 두로 시돈은 북이스라엘의 경계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하려고고 했고 유대인들은 두로와 시돈 페니키아인들을 이방인이라고 해서 개 취급을 했기에 서로의 관계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두로와 시돈지역 선교여행은 가깝지만 쉽지않은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선교하려고 할 때 쉽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정서적 상황 아래에서 놀라운 교훈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줍니다.

 

서로의 관계가 쉽지 않은 부분을 예수께서는 꼬집어 여인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어쩌면 두로 사람이든, 이스라엘 사람이든 서로에 대해 건드리면 터질 수 있는 부분을 여인에게 말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니도 똑같은 유대인놈들이구나 그럼 그렇지” 이랬을지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헬라 이방 여인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보라는 듯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이 이방여인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인내와 함께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모습을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 이방 여인이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의 자신 민족만을 생각하는 이 말에 화가 날만도 하지만 더 바짝 엎드려 절하며 도와달라 간청합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_마15:25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오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그 다음은 이방인에게 향하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두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남으로 이방인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예수를 맞이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바로 이 부분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비’라고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_롬11:25

 

유대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으로 이제 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흘러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흘러가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잠시 유대인들을 우둔하게 하시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_사56:3

 

이사야를 통해서도 ‘연합한 이방인’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합니다. 앞으로 일어날 연합한 이방인들과 함께 세워질 성전을 보여줍니다. 이 성전의 모습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부릅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_사56:7

 

예수께서는 이 이방여인에게 또 한번 해서는 안될 말로 그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15:26)

 

이방인을 개 취급하는 상황입니다. 유대인들은 경멸하는 의미로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예수께서도 보통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대하는 말로 가나안 여인에게 말합니다. 그런데도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께 받는 이러한 수모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고 너무도 현명한 말로 응답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_마15:27

 

“주님 너무도 옳은 말씀입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르러기를 먹습니다. 저는 주님의 개이고 싶습니다.”

 

놀라운 여인의 믿음이요. 아름다운 말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분명 우리가 원하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경멸과 조롱을 겪는 상황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오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오늘의 사건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롱하고 경멸하는 순간 어떤 말로 답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자세인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경직되고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면 유대인들처럼 자기 중심적 신앙으로 바뀌고 이방인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교회를 다니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바뀌게 되면 교회 밖에 외부 사람들과의 단절과 함께 유대인들과 같은 처지가 됩니다. 역사는 반복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처럼 되지 않기를 위해 계속해서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열린마음으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 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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