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교회’ 칼럼 #195 _교회의 큰 사명 ‘용서’
2023년 9월 셋째 주 칼럼(2023.9.17. ~ 2022.9.23.)
성령강림절 후 열여섯째 주일
창세기 50:15-21
로마서 14:1-12
마태복음 18:21-35
지난 주에 이어서 마태복음 18장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8장 교회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1-14절 작은 자의 소중함, 15-20 교회의 본질, 21-35 교회의 가장 큰 사명 ‘용서’ 이렇게 세 가지로 예수께서는 교회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사람의 관계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어렵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됩니다. 특히 두세 사람 이상이 모이는 교회는 사람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이기에 더 많이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_마18:22
교회는 먼저 작은 자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자신이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자가 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내가 어린 아이와 같은 작은 자가 되어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잃은 양 비유를 통해 또한 잃은 양이 작은 자임도 말씀합니다.(마18:10-14)
교회 안에서 죄를 범하는 자가 생기게 되면 앞에서 이야기한 작은 자의 관점에서 해결합니다. 먼저 두 세사람이 함께 해결점을 찾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을 때 교회 공동체가 함께 일을 처리합니다. 이때는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용서’입니다. 사실 앞에서 살펴본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도 교회 안에 죄를 범한 형제에 대한 것도 모두 ‘용서’의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나아와 질문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마18:21)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합니다.
일곱 번에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은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에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끝까지 용서해야 합니다. 제가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끝까지 용서한다는게 사실 정말 어렵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의 임금에게 일만달란트 빚진 자가 있습니다.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모두 탕감해 줍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일만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많은지 셀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본인이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두 일만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일만달란트 빚진 자는 임금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를 마땅히 다른 빚진 자를 보면 그에게도 동일하게 빚을 탕감해 주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만달란트 빚진 자는 백 데라리온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합니다. 임금은 일만달란트 빚진 자를 다시 불러 일만달란트를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깁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_마18:35
우리가 교회 안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기본적으로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이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도 용서받지 못하게 됩니다.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그렇기에 ‘용서’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의도적으로 더 선한 일을 행하자고 함께 이야기 나눴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존심 상하고 생각하면 분을 참기 어려운 일을 겪었더라도 의도적으로 용서하는 겁니다. 내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용서’하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지만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것만으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상황이라면 형들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헸겠습니까? “다음에 만나기만 해라 똑같이 갚아주고 말거다” 독기를 품고 이를 악물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야곱과 함께 온 가족이 애굽에 내려와 살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 야곱이 죽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형들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_창50:15
형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것처럼 요셉이 자신들에게 똑같이 갚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찹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가득 찬 형들은 요셉에게 아버지가 유언으로 주었던 말을 전합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어라 하였으니 이제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리고 요셉에게 찾아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창세기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합니다. 애굽에 와서 살았지만 진정으로 서로 함께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그려집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_창50:19-22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없습니다. 형들의 간절한 사죄하는 마음과 함께 요셉의 용서가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이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가 각자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설령 자신의 잘못을 잘 모른다 하더라도 죄에 대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서로 빚을 지지 않기 위한 실제적인 방법을 안내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 작은 자에 대한 태도입니다. 분명 누군가가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만큼 연약하고 작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어떤 잘못이나 실수가 있더라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_롬14:10
더불어 우리 각자는 끊임없이 형제에게 업신여김을 받을 것은 없는지 비판받을 만한 것은 없는지 살피고 하나님께 무릎꿇고 자백해야 합니다.
먼저는 서로에게 용서할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의도치 않았더라도 피치못해 서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이 때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용납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죄도 용서받지 못하게 됩니다. 상대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대해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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