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교회’ 칼럼 #198 _예수를 아는 지식
2023년 10월 둘째 주 칼럼(2023.10.8. ~ 2022.10.14.)
성령강림절 후 열아홉째 주일
이사야 5:1-7
빌립보서 3:4-14
마태복음 21:33-46
이사야 5장 1-7절과 마태복음 21장 33-46절 말씀의 공통점은 “포도원”이다. 성경에는 유독 포도원과 포도와 관련된 말씀이 많이 등장한다. 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도로 가에서 포도를 사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이스라엘에서 포도는 가장 일반적이고 모두가 즐기는 과일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이 대대로 자연스러운 일이었음을 짐작해 본다. 성경에 포도와 포도나무, 포도원에 대한 비유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_사5:1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_마21:33
이사야에는 “포도원 노래”라고 불리는 비유의 말씀이 기록된다. 이사야 5장은 포도원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현 상황을 고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땅을 파고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었다. 포도원을 보호하기 위해 망대도 세우고 그 안에 술틀도 파서 좋은 포도 맺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웬걸! 들포도가 맺혔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_사5:7
이스라엘 족속은 포도원이고 포도나무는 유다 사람이다. 이사야 5장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이 이야기를 듣고 돌아선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한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교회는 포도원이고 그리스도인은 포도나무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이사야 말씀을 통해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극상품 포도로 심었는데 지금 너희들의 모습은 들포도이구나. 이 말씀을 통해 현 교회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현 교회에 대한 선포의 말씀인지 모른다. 우리 교회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마태복음 21장 33~46절에도 하나의 포도원 비유가 등장한다. 참 재미있게도 이 포도원도 이사야 5장에 등장한 포도원과 너무도 같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_마21:33
이사야 5장의 하나님께서 가꾼 포도원의 모습과 마태복음 21장의 주인이 포도원을 가꾼 모습이 너무도 유사하다. 포도원에 산울타리에 망대를 세우고 술틀, 즙 짜는 틀을 만들어서 포도열매가 맺어지길 기다린다.
마태복음 21장은 포도원 일꾼들에게로 초점이 바뀐다.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모두 맡겼다. 그리고 열매가 맺어질 때쯤 되어 주인의 종들을 보내 열매를 받으러 갔으나 어찌 된 것인지 이 포도원 농부들이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다. 마치 자신의 것으로 착각을 하고 주인의 종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다시 더 많은 종들을 보냈으나 모두 죽인다. 주인은 이제 아들을 그들에게로 보낸다. 포도원 농부들이 아들에게는 존대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생각과는 달랐다. 상속자를 죽여서 그의 유산을 자신들이 차지할 생각을 한다. 생각의 차이가 나도 너무 나는 순간이다.
이 두 비유에서 공통된 것 또 한 가지는 이것이 모두 자신들이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종교적으로 신실한 일꾼들에게 하신 예언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아끈공동체에 속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과연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집에 있는 교회로 가정교회를 세워가는 분명한 이유는 예수께서 원하시고 세우시려 했던 교회 원형의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교회와 다른 모습이지만 처음 교회의 모습이 가정교회였고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교회가 가정교회이다.
우리의 자랑이 건물교회가 되면 안된다. 우리의 자랑이 교회의 규모에 있으면 안된다. 우리의 자랑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력이면 안된다. 우리의 자랑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있으면 안된다.
바울은 예수를 알기 전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 이력이 자랑이었다. 유대인으로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방인 가운데 살았지만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 열심을 다해 살았다. 그런데 예수를 알고 나서 그 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그 전에는 그렇게도 소중하고 중요했던 것이 이제는 모두 배설물로 여겨진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_빌3:5-6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장 소종한 것으로 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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