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교회 칼럼’ #88_ 성경의 급식이적이 주는 교훈
2021년 7월 넷째 주 칼럼(2021.7.25. ~ 2021.7.31.)
성령강림절 후 아홉째 주일 성서일과
열왕기하 4:42-44
에배소서 3:14-21
요한복음 6:1-15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_왕하4:43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_요6:9
우리는 보통 성경에서 급식이적 하면 ‘오병이어 사건’을 떠올립니다. 맞습니다. 대표적인 급식이적은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급식이적이 이미 구약시대에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여러 가지 이적을 많이 일으켰던 선지자입니다. 그 중에 급식이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께서 행하신 급식이적과 너무도 유사한 형태로 이적이 일어납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너무도 놀라운 이적이었기에 예수의 이적 기사 중 유일하게 사복음에 모두 기록됩니다. 마태복음 14장, 마가복음 6장, 누가복음 9장, 요한복음 6장에 각각 기록됩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 공간복음보다 좀 더 자세한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큰 무리를 보시고 빌립에게 저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는지 묻습니다. 빌립은 명석한 머리로 얼마 정도의 돈이 필요한지 계산해 냅니다. 빌립은 약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예수께 말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_요6:5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_요6:7
예수께서 빌립을 불러 물으시는 광경을 보고 있던 안드레가 예수께 나아와 그런데 놀랍게도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안드레도 믿음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_요6:8-9
구약의 급식이적은 열왕기하 4장 42-4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엘리사에게 보리떡 20개와 채소를 담은 자루를 줍니다. 그때 사환은 엘리사에게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어 먹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말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오병이어 사건’와 너무도 유사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한 사람이 가지고 온 보리떡 20개와 채소를 담은 자루 모두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닙니다. 이 음식은 ‘한 아이’,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음식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음식입니다. 사실 불가능입니다.
엘리사는 사환을 통해 이 음식으로 100명의 사람들에게 먹이라 합니다. 예수께서 빌립과 안드레에게 오천명의 사람들을 먹이라 하는 장면과 같습니다. 사환, 빌립, 안드레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에 대해 말합니다. “어찌 이것으로 저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엘리사의 급식이적도 예수의 급식이적도 한 사람을 통해서 시작되었고 중간에 이를 전달하는 매개자도 동일하게 너무도 당연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믿음과는 상관하지 않고 급식이적은 일어납니다. 장정만 100명이니 아마도 400-500명은 되는 인원이었을 것입니다. 장정만 5,000명이니 아마도 20,000명은 넘는 인원이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음식이 수많은 사람들의 먹을 거리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한 사람의 먹을 거리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안드레와 사환입니다. 이 두 사람은 먹을 거리를 엘리사와 예수 앞에 가지고 오지만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전달을 합니다. 믿어지지 않아서 계산만 하고 끝낸 사람이 있습니다. 빌립입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을 통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어지지 않더라도 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드레와 빌립니다. 이 경우는 믿어지지 않더라도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우리가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빌립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순종하는 것이 곧 믿음임을 우리는 보여줍니다. 진정한 믿음은 머리로 계산해서 “될거야! 할수 있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안 될 줄 알면서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_왕하4:43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_요6:12
두 급식이적 모두 한 사람의 먹을 거리에서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두 배불리 먹고 거기에 음식을 남기게 하셨을까요?
아마도 음식이 남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남은 음식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우리의 눈으로 분명하게 확인시켜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에 더 넘치도록 주실 수 있는 분임을 확인시켜줍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느히 하실 이에게” _엡3:20
급식이적은 우리에게 주신 교훈이 정말 많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 이 외에도 더 많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 14-21절은 바울사도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 속에서 좀 더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급식이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영광의 풍성함’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으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두려울 것이 없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_엡3:16
급식이적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함께 하시며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고 그 사랑의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가 깨달아 우리로 하여금 충만함을 경험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_엡4:17-19
바울사도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오늘 급식이적을 통해 우리 주님이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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