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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돕는 베필

‘집에 있는 교회 칼럼’ #93_ 돕는 베필

 

2021년 10월 첫째 주 칼럼(2021.10.3. ~ 2021.10.9.)

성령강림절 후 열아홉째 주일 성서일과

 

창세기 2:18-25

히브리서 2:5-12

마가복음 10:1-12

 

 

 

 

창세기 2장 18-25절은 최초 가정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빗대로 ‘돕는 베필’인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저는 돕는베필 하면 제가 연애할 때 생각이 납니다. 제가 저희 집사람을 만나고 결혼하기로 마음 먹고 꺼내들었던 말씀이 창세기 2장 18절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_창2:18

 

저의 돕는 베필이 되어달라고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와를 지어주실 때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서로가 돕는 베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돕는 베필이 되고 하와는 아담에게 돕는 베필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데 있어서 첫 번째라 할 수 있는 덕목입니다. 서로 돕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도울 수 있을까? 무엇이 더 필요할까?”를 생각하며 부지런히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반대로 서로 무엇인가 해 주기를 바라는 순간부터 부부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부부가 되는 순간부터 참 이상하지요. 첫 가정을 시작했던 아담과 하와처럼 두 사람이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발가벗고 있지 못하는데 부부 사이는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합하여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_창2:24

 

결혼을 한 후에 두 사람이 합하여 한 몸이 될 때 생기는 놀라운 신비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은 개천절입니다. 우리나라가 세워진 이레로 아마 지금이 가장 많은 부부가 이혼을 하고 가정이 깨지고 있는 시기가 아닐까요. 우리가 부부의 신비를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부부가 가지는 이러한 신비를 쉽게 생각했던 문화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좋을대로 해석해서 부부의 신비를 깨뜨려버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와서 아내를 버리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지금처럼 합의해서 이혼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 맘에 들지 않으면 아내를 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모세의 율법이 허락한 부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아내 버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_막10:8-9

 

그 다음에 재미있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제자들이 집에 돌아와서도 다시 예수께 묻습니다. “이혼해도 되는 겁니까?”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서로가 간음을 행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혼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떠시나요? 제자들처럼 다시 묻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요?

“이혼 하면 안 되는건가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남편과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는 아내 모두를 이야기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몸이 되어야 함을 떠올리게 됩니다. 한 쪽은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한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균열이 생기게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돕는 베필을 선물로 주셨나 봅니다.

 

부부에게 이러한 신비가 생기는 것과 부부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데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가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 되시고 나는 신부가 됩니다. 서로 발가벗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깊은 신비가 주님과 나와의 사이에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든 부끄러움을 주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기에 주님과 첫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죄악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두 보여줄 수 있습니다.

 

신랑된 그리스도와 신부된 나와의 관계에서 부부의 신비가 동일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랑된 그리스도의 돕는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신부된 우리를 돕기 위해 잠시 천사보다 낮아지셨고 고난과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셩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_히2:9

 

여기서 우리는 돕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보게 됩니다. 부부의 신비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방법은 남편은 아내를 위해, 아내는 남편을 위해 고난도 받고, 죽음을 맛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부부의 관계에서만 일어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이웃이 ‘작은예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작은 이웃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끈공동체 안에 이러한 부부의 신비가 더욱 풍성히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서로가 부끄러움을 감추려하기보다 다 드러내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고 서로 돕기 위해 더 힘쓰고 노력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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