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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집에 있는 교회 칼럼’ #96_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2021년 10월 넷째 주 칼럼(2021.10.24. ~ 2021.10.30.)

성령강림절 후 스물 둘째 주일 성서일과

 

예레미야 31:7-9

히브리서 7:23-28

마가복음 10:46-52

 

 

 

예레미야 31장은 크게 두 대상의 회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1-22절은 북이스라엘의 회복을, 23-26절은 남유다의 회복을 예언합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보게 되는 말씀 31장 7-9절은 북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북이스라엘은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앗수르 제국의 정책은 이주정책이었습니다. 자신의 속국이 된 나라들의 백성을 서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켜서 더 이상 힘을 키우지 못하게 하는 정책입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북쪽 땅으로 강제 이주되어 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북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남은 자가 있고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책임지시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_렘31:7-8

 

듣도 보도 못한 타지에서 새롭게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생활이 얼마나 힘든 생활이었을까요? 그렇기에 남은 자가 되어 다시 돌아오는 이들은 맹인, 다리 저는 자, 잉태한 여인, 해산하는 여인 등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 그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자를 “남은 자”라 부르시며 그들을 다시 끌어안으십니다.

 

구약성경에서 “남은 자 사상”은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 남유다 모두 각각 주변의 강대국에 의해 멸망을 경험했고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흩어져 살아가는 타지에서 야웨의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의 신앙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가 “남은 자”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도 분명 이 “남은 자 사상”은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모두 남은 자가 아니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고 따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전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 안에서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일일이 구별할 필요도 없습니다. 먼저 나의 신앙이 온전히 예수님의 따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잘 살아가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럼 예수께서 ‘남은 자’로 여기시고 구원해 주셨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남은 자에 대해 더 살펴보겠습니다.

 

각 복음서마다 자신의 복음서에만 나오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를 각각의 복음서 이름에 특수자료를 붙여 부르게 됩니다. 마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이야기를 ‘마가특수자료’라고 부르고.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이야기는 ‘누가특수자료’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각각의 복음서 이름에 ‘특수자료’를 붙여서 부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마가복음을 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마가특수자료 중에 하나가 ‘맹인 바디매오’ 이야기입니다.

 

각 복음서마다 특징과 주제가 있습니다. 특수자료는 복음서의 특징과 주제를 잘 보여주는 사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여리고에 사는 사람입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입니다. 이곳을 지나야 예루살렘에 가게 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엄청난 열정으로 예수님을 부르며 쫓아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레미야의 남은 자에 대한 예언 중 맹인을 돌아오게 하겠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렘31:8)

 

맹인 바디매오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예수께 있어서는 ‘남은 자’였습니다. 바디매오가 소리 외쳐 예수를 부르며 따를 때 많은 사람들은 그를 꾸짖고 조용하라고 자제시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_막10:48

 

예수께서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남은 자라고 생각했지만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남은 자가 아니였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남은 자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남은 자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남은 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_히8:25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십니다. 진정 예수만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예수만 온 열정을 다해 따랐습니다. 바로 그 열정으로 예수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에 ‘작은 예수’를 찾아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은 그게 전부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남은 자로 살아가는 길은 그렇게 예수를 쫓아 살아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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