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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복음적 삶

‘집에 있는 교회 칼럼’ #97_ 복음적 삶

 

2021년 10월 넷째 주 칼럼(2021.10.31. ~ 2021.11.6.)

성령강림절 후 스물셋째 주일 성서일과

 

신명기 6:1-9

히브리서 9:11-14

마가복음 12:28-34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숚게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_막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질문합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이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는 논쟁을 “큰 계명 논쟁”이라고 부릅니다. 큰 게명 논쟁은 마태복음 22:34-40, 누가복음 10:25-37에도 기록됩니다.

 

큰 계명 논쟁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각각 기록된 평행본문을 잘 살펴보면 좋습니다.

 

율법의 개수를 613개라고 합니다. 613개의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무엇인지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께서는 너무도 명쾌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신명기 6장과 레위기 19장의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든 계명 중에서 이 두 계명을 가장 큰 계명으로 믿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두 계명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기록합니다. 모든 계명은 결국 이 두 계명으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어떤 논쟁을 하게 되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성경적인 것이 무엇이냐?”입니다. 서로 논쟁할 때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 때가 많습니다. 이 때 우리가 빠지는 함정이 이 질문을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율법주의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적인 것이 가장 하나님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정작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는 못합니다.

 

가장 성격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은 그것이 가장 하나님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성경적인 것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깨닫지 못합니다.

 

가장 성경적인 것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 자신의 생각, 누군가의 생각을 가장 성경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찾는 가장 성경적인 것은 가장 큰 계명은 이 두 계명이다라고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_막12:30-31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큰 계명인데 이것을 우리는 다시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잘 못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로 드리는 제사라고 생각하십니까? 종교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영으로 드리는 제사(예배)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진정 그런 자리가 되도록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율법적인 것이 무엇이냐? 가장 성격적인 것이 무엇이냐? 물으며 논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본분이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 큰 계명 논쟁에서는 예수께서 한 예화를 들려주십니다. 그 예화가 ‘선한 사마리아인’이야기입니다.

 

가장 율법적인 것이 무엇이냐 묻기를 좋아하는 제사장, 레위인 정작 자신의 삶의 자리에 나타난 이웃을 돌보지 않습니다. 피해 도망칠 뿐입니다. 우리가 가장 성경적인 것이 무엇이냐? 묻는 종교인들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 나타난 이웃을 돌보지 않습니다.

 

마치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러고는 나는 교회에서 24시간 예배드리는 것을 자랑합니다. 참 답답합니다. 그러고는 귀와 마음을 닫습니다. 나는 성경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안도에 한 숨을 내쉽니다.

 

성경은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습니다. 제사를 먼저 앞세우지 않습니다. 이웃을 먼저 사랑하는 것을 앞세웁니다. 이웃이 곧 작은 예수요. 하나님이기에 그렇습니다.

 

예배를 드려야 할 시간에 간절한 이웃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그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이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한 사람을 도왔던 사람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유대인들이 멸시했던 사마리아인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서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우리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절대로 복잡하지 않습니다. 너무 단순합니다. 이 가장 큰 계명을 가장 성격으로 잘 해석하고 나의 삶에 적용하면 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것을 말하고 논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성경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공부해서 안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과 주장을 듣고 하는 경우입니다.

 

성경을 잘 모르기에 성경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가장 성격적으로 사셨던 분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귀결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_히12:30-31

 

우리가 가장 성경적으로 사는 길은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복음은 절대로 복잡하지도 신학적이지도 않습니다. 복음은 단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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