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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끈공동체 금요칼럼

주의 영이 계신 곳

 

‘집에 있는 교회 칼럼’ #113 _주의 영이 계신 곳

 

2022년 2월 셋째 주 칼럼(2022.2.20. ~ 2022.2.26.)

주현절 후 일곱째 주일

 

창세기 45:3-11

고린도후서 3:12-18

누가복음 6:27-38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_마7:12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_눅6:31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황금율’이라는 별명이 붙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희 가족이 가정교회를 세워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을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묵상하고 삶으로 살아내려고 힘썼던 부분이 성경적 재정원리를 따라 살아가려고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원리가 ‘심음의 법칙’이었습니다. 황금율의 말씀이 심음의 법칙으로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_갈6:7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_고후9:6

 

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심은대로 거두게 되는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심음의 법칙은 자연 속에 자라나는 씨와 열매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6장 7절에 “무엇으로 심든지”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믿음을 심으면 믿음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용서를 심으면 용서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남에게 대접 받고 싶은대로 나도 대접하면 대접한 만큼 나도 그 대접을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심음의 법칙’을 바울이 설명할 때 ‘연보’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물질 즉 돈도 이 심음의 법칙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희 가정은 이 원리를 따라 지금까지 살아가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뿌릴 씨와 먹을 양식을 때를 따라 주셨습니다. 그렇게 주신 씨는 필요한 곳에 잘 뿌렸습니다. 그리고 먹을 양식은 만나와 메추라기와 같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참 이상하게도 한참 부족할 것만 같은 저희 가정에 지금까지 부족함이 없이 먹을 양식을 채워주셨습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_고후9:10

 

이것을 저희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연보로 공동체에 들어오는 씨를 주변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뿌립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열매 맺게 하십니다.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이 총리 된 것이 아닌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용서’라는 씨를 심습니다. 참 놀라운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이 얼마나 미웠을까요!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용서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이 있을 수 있었던 발판을 만듭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_창45:5

 

요셉의 이 놀라운 신앙고백은 부모로부터 받은 신앙의 유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이어진 야훼의 신앙은 요셉에게 잘 흘러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내지 않고 성심껏 대접했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렇게 대접하고 흘려보내는 신앙의 모습이 요셉에게까지 잘 전달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용서하기 힘든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요셉입니다.

 

요셉을 통해 이집트로 오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동안 애굽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가 차매 모세를 통해 출애굽 하게 하십니다. 4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십계명과 함께 율법을 전달합니다. 모세가 십계명과 율법을 받고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로 얼굴에 수건을 쓰게 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_고후3:13

 

모세로 수건을 쓰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보다 앞에 눈부시게 보이는 모세를 신격화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조처였습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게 눈을 보이는 것에 집착을 하고 주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너무도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 퇴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 너무도 선하고 좋은 의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갈 삶의 방향을 알려준 율법이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사람을 옥죄고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의미가 상실되고 수건이 덮혀져 보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수건에 덮혀져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예수께서 오셔서 덮혀젔던 수건을 걷어내 주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는 순간부터 율법의 굴레가 아닌 우리 안에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_고후3:17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을 누려보셨습니까? 주의 영이 임하시면 율법이 아닌 주님과 함께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모세를 통해 세워진 율법을 문자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함으로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죽이는 율법조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율법의 형태는 기존의 제도 안에서도 동일하게 만들어지고 사람들을 옥죄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율법은 조문대로 얼마나 잘 지켰는지로 판단합니다. 반면 주의 영을받은 우리는 얼마나 심었는지로 판단합니다. 우리는 누가 얼마나 잘 지켰느냐가 아니라 누가 얼마나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살피고 얼마를 더 채워주었느냐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이러한 경쟁이 붙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무엇이 더 필요한가를 지속적으로 살피고 서로의 필요를 계속해서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음의 법칙이 공동체를 넘어 더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로 흘러가면 좋겠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서로를 끊임없이 돌아보는 마음의 풍성함과 함께 자유함을 누리는 곳이 됩니다. 주의 성전이 된 내가 그런 곳이 되고, 그런 내가 있는 공동체가 그런 곳이 되고, 공동체가 있는 바로 그 지역이 그런 곳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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